“평생 가야금과 연애하며 살고 있어요.” 탄금(彈琴) 63년,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 황병기 명인(78)은 음악인생의 뿌리를 명쾌한 문장으로 담아낸다. “그냥 좋아서” 걸어온 길에는 어떤 사명감도 거창한 꿈도 덧씌워지지 않았다. 산이 거기에 있어서 오르듯 가야금 열두 줄에는 실체 없이 부유하는 욕심도 내려앉은 적이 없다. 미망에서 비켜난 삶 위에는 예술에 대한 순수한 집념만이 오롯이 남아있다.

그가 가야금과 처음 만난 때는 부산 피난 중이던 1951년, 경기중 2학년 시절이었다. 우연히 고전무용 연구소를 지나다가 김철옥씨(첫 가야금 스승)의 가야금 소리에 매료되어 인생의 항로를 새롭게 열게 되었다. 이후 부산 용두산 꼭대기에 있던 국립국악원을 찾아가 김영윤 선생으로부터 정악(궁중음악)을, 가야금 산조의 대가 정남희에게 사사받은 김윤덕 선생으로부터는 산조를 전수받으며 가야금의 깊이를 알아갔다. 훌륭한 스승, 명인들과의 만남이 음악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시킨 것이다. 물론 가야금에 대한 확고함은 완고한 현실에 부딪치기도 했다. 당시에는 국악과도 없었고, 음악을 생업으로 삼을만한 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만류를 동의로 바꾸긴 했지만 가야금을 귀하게 여기지 않던 시대적 분위기가 전환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만큼 현실의 벽이 두꺼워질수록 가야금 명주실에 쓸린 굳은살도 두껍고 단단해져 갔다.

“1951년을 기준으로 앞뒤 10년간이 가야금의 공백기였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참 희귀한 일이긴 하죠(웃음). 저는 서양음악도 즐겨듣는데, 확실히 국악과는 차이가 있어요. 서양음악이 똑같은 벽돌(음)을 쌓아올린 거대한 건축물이라면 국악에서는 모든 음의 모양이 각기 달라서 정원석처럼 음을 배치하죠. 베토벤 교향곡에 장엄한 멋이 있다면 국악에는 천연의 기암괴석을 하나하나 걷는 느낌이 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음악이 바로 숲속의 샘물과 같은 거예요. 정신을 맑게 하는 해독제와 같은 음악이죠.”

가야금뿐만 아니라 운동과 공부에도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다. 법대 공부든 가야금 공부든 ‘배움’에서 기쁨과 가치를 찾아왔기에 배우고 익히는 것을 단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 국립국악원에 드나들며 가야금을 붙들었던 정성은 정직한 결실로 돌아왔다. 대학교 2학년, KBS주최 전국국악콩쿠르 1등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대학 졸업 후 1962년에는 그의 음악세계와 국악의 역사가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다. 한국 음악사상 최초의 현대 가야금곡인 <숲>이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이를 비롯해 처녀작 <국화 옆에서>(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전설><비단길><가라도><침향무(沈香舞)> 등의 작품들은 국악의 교과서를 넘어 고전이 되었다. 특히 <침향무>(1978)는 여전히 국악 분야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이처럼 승승장구했지만 “가야금으로 밥 벌어 먹을 생각은 없다”는 소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예술을 등에 업고 현실을 등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일장일단을 떠나 사회경험이 있어야 음악의 길이 막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1974년 서른여덟, 이화여대 한국음악과가 설립되어 전임교수직을 맡게 되면서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명동극장의 지배인, 출판사, 영화제작, 화학공장 운영까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면서도 가야금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가야금을, 가야금은 그의 곁을 지켜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곡마다 팔자가 있는 것 같아요. <미궁>이 아방가르드한 곡이라 큰 화제가 됐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은 <침향무>에요. <미궁>이 가장 안 팔린 음반이죠(웃음). <미궁>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주기를 그린 거예요. 처음의 ‘초혼(招魂)하는 소리’는 우주의 어떤 혼을 부르는데, 이는 탄생을 말해요. 끝에는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데, 여기에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넣었죠. 언어는 문화적인 소리라 번역이 필요하지만 웃음과 울음은 비문화적인 소리라 번역이 필요 없죠.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곡이지만 표현이 낯설고 색달라서 신선한 충격을 준 것 같아요.”

전통음악의 문법을 탈피한 파격적인 시도로 원초적 공포와 초자연적인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킨 <미궁(迷宮)>(1975)은 50년대 말부터 서양의 전위예술을 향한 그의 탐구정신이 빚어낸 작품이다. 이를 상기하며 그를 전위적인 예술가로만 인식하기도 하지만 사실 명상적인 곡들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는 본말이 전도된 경계허물기도 곡해된 동시대성과 보편성이 낳은 ‘국악의 대중화’도 필요 없다. 자기 자신을 넘어 전통과 정통의 자장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저 ‘황병기의 언어’로 시대를 치유하는 “선한 음악”만이 있을 뿐이다.

“전통음악을 깬다는 것은 결국 조선음악의 틀을 깨는 것이고 이는 신라로의 회귀를 의미해요. 신라의 유형문화가 해답이었죠. 반가사유상과 같은 조각품은 움직임의 한 찰나인데, 이 무형의 움직임이 신라시대의 움직임이에요. 한번은 경주에서 별을 바라보는 데 그 별이 곧 신라의 별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신라인으로부터 무용곡을 위촉받았다 생각하고 작곡한 거죠. 그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상상하며.”

자기본위의 음악을 추구하며 참신한 시도로 국악의 전통과 스스로의 전통을 기록해온 명인 황병기. 세상에 특별히 남기고 싶은 것도 어떻게 기억되고 싶지도 않다는 그는 자식들에게 무덤도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명성에도 고요한 정신세계는 조급한 물살에 휘감기지 않는다. 연주가의 정직한 육체만이 부단히 굽이칠 뿐이다.

“연주는 육체의 문제라 하루도 쉬면 안 되죠. 창작도 정신이 가할 수 있어요. 더 이상 힘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예요. 돌아보면 첫 해외 연주회인 하와이 연주(1965),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1990) 등 잊지 못할 무대가 많아요. 그런데 아마도 내년 요코하마에서의 연주회를 끝으로 해외연주는 그만둘 것 같아요. 외국에 나갈 생각도 기력도 없어서(웃음).”

가야금 오동판과 명주실에 흐르는 예술혼은 “좋은 음악을 쓰고,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한 실존 그 자체였다.

 1999년 대장암 수술로 병원에 있을 때도 병원 시계탑을 보며 <시계탑>이라는 곡을 써냈던 그였다. ‘시로써 일어나며 예로써 서며, 음악으로 완성된다’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빛깔 그대로 실천해온 것이다. “평범한 말 속의 진리와 민주성이 좋아서” 삶의 철학으로 삼았다는 <논어>처럼 그의 음악도 시대를 초월한 음악철학으로 남을 것이다. 수많은 별들을 껴안은 12궁도와 같은 가야금 열두 줄에는 인간 내면의 소리와 그만의 소우주(小宇宙)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무정형의 음악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