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지 어느덧 9년이 되었다. 서울에서 막연하게, 아니 소리 없이 떠나와서 시작한 로스쿨 유학생활이 나의 생활 터전을 바꿔 놓을 줄 그땐 정말 몰랐다. 앞으로도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살지 지금도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국 연예계, 미국 법조계, 뉴욕이라는 도시, 그리고 국제중재 분야 등, 내가 몸담고 있는 환경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새로운 사람과 상황을 맞이하는 일이 일상이 된지는 오래다. 국적, 출신, 그리고 분야와 상관없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서 협업하며 생활하고 있다.
만남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만남이란 사람뿐만 아니라 일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책을 만나고, 음악을 만나고, 법을 만나고,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또 다른 일과 도전을 기대하고 있다. 갈등과 실패, 그리고 작은 성취와의 반복되는 만남을 가지며 열심히 35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비눗방울처럼 몽글몽글 피어나다 터지는 수많은 만남 중에 절대로 터지지 않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이 있다. 내 가족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진 첫 번째 만남은 엄마 아빠 언니와의 만남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떤 만남보다도 자연스럽고 강렬했다. 늦깎이 유학생이셨던 아빠를 따라 5살 때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신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시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 피아니스트의 꿈이 있었던 언니는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혼자 피아노 선생님이 계신 미국에 머물게 되었다. 
우리 식구는 그때 벌써 만남보다는 헤어짐을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메일도, 카톡도, 화상 통화도 없던 시절,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 번 큰마음 먹고 비싼 해외 전화로 3분의 시간 동안 한 달 밀린 야이기를 쏟아내기도 했고, 언니와 나누지 못한 대화를 일기 대신 수첩에 적어놓았다가 한꺼번에 부치기도 했다. 지금 부모님 집에 가면 언니와 주고받은 편지와 쪽지가 한 상자에 가득하다. 2년 동안 언니 얼굴도 못 보고 지나갈 때도 많았다. 엄마 아빠는 멀리 있는 어린 딸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걱정하셨을지 이제야 조금 짐작이 간다. 언니는 미국 기숙사에서 한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식빵에 고추장을 발라 먹곤 했다고 한다. 


세상이 변화하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서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화면으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출장과 휴가로 예전보단 훨씬 자주 서울과 미국을 오고 가는데, 우리 가족 사이에 계속되는 전통이 하나 있다. 우리 식구는 절대로 공항에 나가지 않는다. 공항에 나가는 수고의 번거로움이나 가족 관계의 담백함 때문이 아니다. 떠나는 사람과 배웅하는 사람의 아픔을 최소화하는 장치인 셈이다. 
택시를 타고 도심 공항 터미널에 일찌감치 가서 엄마가 보온병에 싸오신 닭죽을 한 그릇 먹고, 커피 한잔하고, 인사를 나누고 혼자 공항버스를 탄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헤어짐의 슬픔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어떤 성스러운 공간이나 순례의 길보다 더 간절하게 온 마음을 다하는 기도는 공항 터미널 버스 안에서 이뤄진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안전하게 가족을 지켜 달라는 간절한 부탁은 하늘에 닿을 거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는다. 딸을 다시 멀리 보낸 엄마 아빠는 내가 잠시 머물던 방의 이불을 다시 정리하시고, 딸내미 온다고 준비해 놓으신 먹다 남은 반찬으로 1~2주를 사신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가는 사이, 언니는 부모님을 전화로 안심시킨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일상으로, 각자의 일터로 복귀한다. 다른 가족처럼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고 나들이 가는 일상을 공유하지는 못해도, 특별한 계기들을 만들고 쪼개진 시간을 몰아서 또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위로한다.


만남과 헤어짐은 세트다. 이런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는 마주할 영원한 이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수없이 되풀이 되는 가족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그 간극보다 더 크게 시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무의미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 가족과의 헤어짐에 대한 보상으로 다시 만나면 반드시 업그레이드된 내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결심을 한다. 이보다 더 큰 동기 부여는 없다. 
이렇게 가족과의 헤어짐은 변화된 나와 만나는 계기가 된다.

* 1982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미국 노스웨스턴 로스쿨에서 Juris Doctor 학위 취득. 1998년 1집 <소녀>로 데뷔 후 4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 저서로는 <딴따라 소녀 로스쿨 가다>. 문화 예술 비영리 단체 Music by the Glass의 디텍터로 뉴욕에서 활동. 現 국제상업회의소 국제중재법원 뉴욕지부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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