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오후의 그림카페 _ 나의 사계절 _ 손영경

손영경, 일러스트레이터

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새싹, 따스한 바람, 벚꽃…. 이 계절은 온통 좋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내 고양이, 11년째 함께하고 있는 고양이 ‘복이’다. 겨우내 5분, 10분, 조금씩 열던 창문을 활짝 열면 복이는 창가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종일 앉아있다. 복이가 앉아있는 창가는 내 작업 책상 바로 옆에 있어서 틈틈이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구경한다. 한참을 골골거리던 복이의 털을 쓰다듬으면 정말로 봄처럼 따뜻하고 부드럽다. 내 마음도 봄처럼 따스해진다.

여름 창가에는 화분을 둔다. 겨울을 버티느라 고생한 화분들이 쨍쨍한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푸르고 튼튼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어제보다 조금 더 튼튼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가 거세게 오지 않고 톡톡거릴 때는 화분을 창가에 바짝 붙여 비를 맞게 해 준다. 이파리에 톡톡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 화분들이 “오늘 기분 좋다”라고 내게 말을 거는 듯하다.

가을이 되면 산책을 자주 한다. 노을과 낙엽을 보면서 걷다 보면 문득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소설책이라도 한 권 읽고 나면 온갖 생각이 든다. 왠지 쓸쓸하면서도 무언가 그리운 느낌이 들어 예전에 적었던 일기장을 펼쳐 읽어 보기도 하고, 오늘 했던 생각을 모두 기록해 놓고 싶어서 빽빽이 일기를 쓰기도 한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울 때보다 약간 그립고 아련한 느낌이 들 때는 더욱 그렇다. 온갖 복잡한 생각들, 오묘한 감정을 열심히 적어 한 페이지를 채우면 마치 큰일을 해낸 듯이 뿌듯하다. 커피와 음악이 함께해 주면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나기도 한다.

초겨울이 되면 갑자기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코가 간절해진다. 겨울에는 핫초코 말고도 귤, 붕어빵, 길거리 어묵, 군고구마, 호빵 같은 것들이 자주 생각나지만, 핫초코는 좀 더 특별하다. 나는 스물한 살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는데,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마다 아팠다. 죽을 끓여 먹을 기운은 없고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을 때 편의점에서 핫초코를 사다가 마셨다. 외롭고 아플 때 내가 나에게 주는 보살핌과 위로였다. 지금도 추위가 슬슬 느껴지는 11월쯤이 되면 한 통 사 놓고 겨울 내내 마신다. 볼은 통통해지고 마음은 말랑말랑해진다. 때마침 창밖에 눈이 내리면, ‘아, 겨울은 참 아름답고 행복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나는 좋고 싫음이 분명했다. 봄은 이러이러해서 좋고, 겨울은 이러이러해서 너무 싫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것도 ‘좋다’, ‘싫다’로 확실히 나눌 수 없어졌다. 그림도 그렇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사 주신 과학 전집, 어머니가 사 주신 동화 전집의 빈 곳이란 빈 곳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냥 너무 재밌어서 그랬다. 입시 미술을 할 때조차도 치열한 경쟁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리는 순간만은 그림을 온전히 좋아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을 일로 하기 시작하니 그렇지 않게 되었다. 어떤 순간은 그림을 왜 취미로 두지 않았을까 후회했고, 어떤 순간은 아예 그림을 그만두는 상상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나에게 그림은 추위와 아픔만을 주는 ‘겨울’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핫초코를 마시는 순간은 겨울을 봄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봄도 미세먼지가 가득 낀 날은 힘들었다는 것을. 더위와 습기에 짜증으로 가득한 여름에도 바다에 간 순간만큼은 사계절 중 가장 즐거웠다는 것을. ‘좋아한다’ 안에는 ‘좋음’만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싫어한다’에도 ‘싫음’만 있지는 않았다. 내가 느끼는 좋고 싫음을 포함한 모든 감정은 그 순간마다 온도와 색깔이 달랐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소소한 부분이라도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더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소품,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구도를 자주 그린다. 일을 할 때도 해야 하는 일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은 부분을 찾아낸다. 그래도 힘들면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그리는 개인 작업을 더 많이 한다. 그렇게 해서 오늘 ‘좋은 것들’의 비율을 점점 더 높여간다. 내 그림과 내 일상을 좋아하는 작은 것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아주 작은 ‘좋아’들을 멀리서 보면 ‘행복’이다.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