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눈부신 그대와의 만남/ 전수미, 변호사

만남

눈부신 그대와의 만남

전수미, 변호사

1982년 전북 군산 출생. 군산여고, 연세대학교 정치학박사. 약 20여 년간 북한이탈주민을 지원하는 활동가이자 인권변호사로서 활동 중. 대한변호사협회 우수변호사상(2017), 북한이탈주민 지원 유공 정부포상 대통령 표창(2021) 등 수상.

나는 어릴 때 친한 친구를 멀리 하늘로 떠나보내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방황했다. 친구의 도움 요청에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컸기에 우리와 한민족이며 나처럼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고향과 성별로 차별받는 북향*(탈북) 여성들을 도우며 그 빚을 갚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힘든 북향 여성들을 지원하는 변호사이기에, 나에게 늘 연락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남한의 냉대와 차별로 인해 마음이 아프거나 갖은 폭력으로 몸까지 아픈 북향 여성들이었다. 그들을 만나 상담하고 도와주는 것이 나의 소명이며 해야 할 일이기에 늘 피 흘리며 선인장을 안고 있는 심정으로 버텨온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파주 지역에 북향민들이 상당수 살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법률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찾아가 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임진강예술단’의 백영숙 단장이었다.

그녀는 내가 그동안 만나고 지원해왔던 북향 여성들과 많이 달랐다. 내가 만난 여성들은 한없이 상처받고 약한 존재로서 마치 깨질 듯한 유리 같아 늘 조심스럽게 만나야 했다. 다른 계층의 여성들은 남한 사람 이상으로 말도 없고, 북한에서 좋은 계층과 혈통이었다는 자부심이 강한 엘리트들이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던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으로 그분들이 자존심 상하거나 오해하지 않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며 상담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백 단장은 자립심과 독립심이 대단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이끌고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로움까지 느껴지는 ‘여장부’였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온 것을 숨기지도, 북한 말씨를 지우고 남한 말씨를 따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솔직담백하고 진국인 사람 그 자체였다. 사람 내음을 늘 그리워했던 나는 백 단장과는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무장 해제되었는데, 누구보다 마음 편히 만나 울며 웃고 오랜 세월을 함께해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녀의 매력은 무조건적인 강함만은 아니었다. 많이들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대부분의 북향민들이 배고프거나 북한 체제가 싫어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는 북한의 턱없이 부족한 의료 환경 속에 너무나도 아파서 중국으로 건너가 수술이나 치료를 받고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한다. 정보가 부족한 탓에 중국도 사회주의 국가이니 무상의료인 줄 알고 치료를 받았다가 치료비를 내지 못해 중국 브로커에게 붙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남한으로 오게 되는 경우도 많다. 백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했고,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 공안에 붙잡혀 선택의 여지없이 남한행을 택했다. 계획에 없었던 일이라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후에 남한에서 죽도록 돈을 벌어 무사히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기에 박스 공장에서 여느 남성들처럼 노동하고 손과 허리가 터져가며 일했던 그녀는 처음에는 ‘잘한다’는 말보다 ‘무슨 여자가 저리 독하고 억세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와서 지하철을 탈 줄 모르고, 세상 물정을 몰라 사기도 당하고 수없이 무시당하며 상처받아온 나는, 북한에서 온 그녀를 보면 너무나도 큰 동질감에 때로는 눈물을 흘리곤 한다. 왜 우리는 눈 떠보니 차별과 혐오를 받는 지역에서 태어났고, 왜 여자라는 몸으로 태어나 열심히 살아도 ‘독하다, 드세다’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당하는 걸까. 한국 사회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제대로 수용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며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분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백 단장은 그 모든 차별과 역경을 다 이겨내고 지금은 파주에서 북향 여성들로 구성된 ‘임진강예술단’이라는 북한 예술 전문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실 남한에서는 북한을 적이나 불편한 존재로 생각해서 북한에서 온 사람에 대한 존중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백 단장의 임진강예술단은 북한의 문화 예술을 통해 남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점에서 진정한 남북 민간 친선대사가 아닐까 싶다. 또한 그녀는 ‘두만강찹쌀순대’라는 북한 음식점을 운영하며 북한 순대와 녹말국수, 녹말전, 인조 고기밥 등을 만드는데, 단언컨대 내가 먹어본 순댓국 중 가장 맛있었다. 그녀의 식당에 놀러 가면 늘 환한 웃음으로 “변호사님 오셨어요. 이것 좀 먹어보세요” 하며 따스한 순댓국과 인조 고기밥을 내어주곤 한다.

대부분의 북향민들은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여유가 없지만, 자립 후 같은 고향 사람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싸워주는 여장부 백영숙 단장. 나는 그녀가 자립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매년 김치와 반찬을 만들어서 나눠주고, 연탄 나르기 봉사를 하는 ‘나눔 천사’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너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래서 오늘도 백 단장을 만나러 가는 자유로가 좋고, 파주가 더 사랑스러운 게 아닐까.

* ‘탈북자’의 영문명은 “North Korean Defector”로, “북한에서 탈출한 상태”만을 주목하여 명명된 것. 이에 대해 이들을 정치적 상태인 “탈출 상태”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어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논의가 있다. 그래서 필자가 2010년 실향민,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만든 용어인 ‘북한에 고향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뜻인 ‘북향민’, 그중 본 에세이의 주제인 ‘북향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